과거 파리 귀족들의 ‘핫플레이스’였던 마레 지구는, 오늘날 감각 있는 파리지앵, 예술가,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모여드는 문화적 아지트로 재조명되고 있다. 갤러리와 공예 상점이 모여 있는 3구 쪽의 마레와 유대인 거리, 성소수자 커뮤니티, 쇼핑 스폿들로 가득 찬 4구 지역의 마레. 다채로운 매력이 공존하는 이곳은 파리 속 ‘또 하나의 도시’로 불릴 만큼 개성이 뚜렷하다. 마레 지구 속 숨은 장소들을 낱낱이 파헤쳐보도록 하자.
마레의 골목들
마레 지구는 단순히 유행을 좇는 동네가 아니다. 다양한 이민자 공동체가 뿌리내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문화를 지켜온 장소들이 골목마다 숨어 있다. 오래된 시장부터 유대인 거리, 앤티크 골목, 미니 차이나타운까지— 화려함 뒤편의 ‘진짜 마레’를 만나볼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앙팡 루즈 시장(Marché des Enfants Rouge)

1615년 시작된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시장이다. 인근의 앙팡 루즈 고아원(Hospice des Enfants-Rouges)에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마레 지구의 다양성과 활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명소이다. 모로코 타진, 이탈리아 파니니, 일본식 도시락, 레바논 샌드위치 등 다채로운 세계 요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뿐만 아니라 과일 가게, 치즈 상점, 꽃집, 내추럴 와인 바까지 함께 있어 눈과 입이 모두 즐거운 곳으로 지역 주민과 여행자들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마레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된다면 여기 추천!
르 플레츨(Le Pletzl)
르 플레츨은 마레 지구에 위치한 전통적인 유대인 거리를 지칭한다. 유대인의 언어로 작은 광장, 작은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호시에르 거리(Rue des Rosier)가 가장 중심지 역활을 하고 있다. 20세기 초에는 동유럽에서 온 유대계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했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후손이 상점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팔라펠, 쿠겔 같은 유대 전통 음식은 물론, 베이글, 코셔 디저트, 제과점, 서점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빠르고 맛있는 한 끼가 필요하다면 이곳만 한 곳이 없다.
참고로 레스토랑 L’As du Fallafel은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크리스피한 팔라펠과 신선한 채소가 어우러진 샌드위치가 대표적이다.
빌라주 생 폴(Village Saint-Paul)
이곳은 마레 지구에서 센 강쪽에 위치한 조용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지역이다. 중세 시대 도시 구조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은, 좁은 골목과 연결된 중정(중앙 안뜰)들이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공간이다. 앤티크 상점, 예술 갤러리, 디자인 숍 등이 흩어져 있어 보물 찾듯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주말에는 벼룩시장과 예술 전시가 열려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들의 교류 공간 역할도 하는 아티스틱한 장소이다. 북적임을 피해 느긋하게 산책하며 한 끼를 즐기기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3구 미니 차이나타운

지하철 3호선 Art et metiers와 Rambuteau 사이에 작은 차이나타운이 존재한다. 이 일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소규모 중국 커뮤니티 지역이다. 20세기 초반, 주로 중국 저장성 원저우(Wenzhou) 출신 이민자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중국 상점과 음식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과거 봉제업과 수입상 중심의 상업 지대였으며, 지금도 중국계 가족이 운영하는 전통 식당과 슈퍼마켓이 남아 있다. 특히 Song Heng이라는 쌀국수 집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맛집 중 한 곳이며, Le Lac de l’Ouest, Maison de Chengdu 등의 중식당에서는 정통 상하이 쓰촨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과 중국계 주민이 자주 찾는 지역으로, 조용히 진짜 파리 속 이민 문화를 경험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박물관 & 미술관
르네상스 이후 파리 귀족들이 몰려들며 정착한 마레 지구는, 지금도 당시의 도시 구조와 건축 양식을 가장 잘 간직한 동네다. 특히 Hôtel Particulier라 불리는 귀족 저택은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전시 공간이자 역사적 건축물이 되어 있다. 예술을 감상하면서 그 시대의 생활 방식과 미감까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마레의 대표적인 미술관, 박물관을 소개한다.
사냥과 자연 박물관(Musée de la Chasse et de la Nature)
2개의 고택이 연결된 공간에 자리한 가장 기이하면서도 세련된 미술관이다. 17~18세기 귀족 저택을 배경으로, 사냥 무기와 동물 박제, 회화, 조각, 현대미술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있다. 특히, 박물관 안에는 사슴, 곰, 여우, 멧돼지, 늑대 같은 다양한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은 실제 동물을 박제한 것이고, 사냥 문화의 흔적이나 수집품의 일부로 사용된 것들이다. 방마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연출로, 관람이라기보다 하나의 연극을 따라 걷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곰이 벽난로 위에 앉아 있고, 늑대가 샹들리에 아래를 지키는 풍경은 참으로 이색적이다. 파리에서 가장 ‘기묘하게 아름다운’ 공간을 찾는다면, 이곳이 정답이다.
파리 역사 국립 문서관(Archives Nationales)
17~18세기 귀족 저택인 오텔 드 수비즈(Hôtel de Soubise)와 오텔 드 로앙(Hôtel de Rohan)에 자리한 국립 문서 보관소이다.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살롱과 대리석 계단, 화려한 응접실은 당시 귀족의 생활 공간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곳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바스티유 감옥에 관한 문서, 도면 등 역사의 한 장면을 그대로 담은 기록물이 보관되어 있어, 프랑스의 정치·문화사에 관심 있는 방문자라면 반드시 들러볼 만하다. 정문을 지나면 조용한 비밀 정원이 펼쳐지는데, 파리지앵들조차 아는 이만 아는 ‘진짜 마레의 안뜰’로 불린다. 작은 미로 같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는 현지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카르나발레 미술관(Musée Carnavalet)
카르나발레 미술관은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의 귀족 저택인 오텔 카르나발레(Hôtel Carnavalet)와 오텔 르 펠르티에(Hôtel Le Peletier de Saint-Fargeau)를 연결해 만든 파리 역사 전문 박물관이다. 지하 1층에서 시작해 지상 3층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선사시대부터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시대, 벨 에포크, 68혁명까지 파리의 모든 시대를 아우른다. 루이 16세의 유언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 혁명 시기의 포스터, 마르셀 프루스트의 서재 재현 등 방대한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각 시대별로 복원된 방과 샹들리에, 벽난로, 회화·가구는 단순한 전시를 넘어, 건물 자체를 하나의 극장처럼 경험하게 만든다. 관람을 마치고 중정으로 나서면, 붉은 장미꽃이 피어 있는 정원이 펼쳐진다. 6월부터 운영되고 있는 정원 카페 겸 레스토랑 '졸리(JOLI)'에서는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며, 미술관이 닫은 밤에는 로맨틱한 저녁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저녁 방문 시 사전 예약을 추천한다.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
보쥬 광장(Place des Vosges) 6번지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실제로 살았던 집이다. 1832년부터 1848년까지 16년간 거주했던 이 아파트는 현재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필 원고, 초상화, 가족사진, 편지, 삽화는 물론, 위고가 디자인한 가구까지 전시되어 있어 작가의 사적이고 예술적인 면모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살롱, 서재, 침실 등 당시의 생활 공간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문학 박물관이라기보다 빅토르 위고의 취향과 성격을 고스란히 느껴 볼 수 있다. 보쥬 광장은 위고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레미제라블’을 구상한 장소로 꼭 들러야 할 마레의 상징적 공간이다.
쇼핑
패션과 예술, 실험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마레 지구는, 파리에서 가장 ‘쇼핑다운 쇼핑’을 즐길 수 있는 동네다. 감각적인 편집숍부터 실험적 하이엔드, 실용적인 도심형 백화점, 절제된 북유럽 디자인까지 취향과 스타일을 고르는 선택지가 다채롭다. 지금 파리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재밌고, 가장 잘 팔리는 것들이 모이는 마레의 대표 쇼핑 스팟 네 곳을 소개한다.
메르시 편집샵(Merci)
레드 피아트 자동차가 세워진 입구로 유명한 Merci는, 마레의 대표적인 컨셉 스토어다. 패션, 리빙, 문구, 빈티지 가구, 향초, 키친웨어까지 일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공간별로 구성돼 있다. 유명 브랜드보다 자체 제작 상품과 윤리적 생산 제품을 중심으로 셀렉하며, ‘잘 팔리는 것’보다 ‘잘 살아지는 것’을 제안한다. 최근에는 k-뷰티 제품들이 입점해 있어, 프랑스를 찾은 한국 여행자에게도 반가운 구성이 될 수 있다. 감각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큐레이션 하는 이곳은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파리 편집숍’이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다. 특히 로고가 박힌 Merci 에코백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파리 쇼핑의 아이콘처럼 여겨진다.
도버스트릿 마켓(Dover Street Market)
하이엔드와 스트리트 브랜드가 공존하고, 패션, 예술, 미식이 함께하는 마레의 대표적인 문화 복합 공간으로 파리 패션 씬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꼼데가르송을 비롯해 구찌, 자크뮈스, 톰 브라운, 바이레도 등 다양한 브랜드가 각기 다른 무드로 구성된 독립적인 공간에 전시되듯 배치되며, 매장 전체는 계절마다 디스플레이가 완전히 리셋되어 일종의 전시처럼 운영된다. 윈도우 디스플레이 없이 곡선 벽 뒤에 상품을 숨긴 방식도 독특하며, 중정 한가운데는 사진작가 파올로 로베르시의 작품이 인쇄된 거대한 원통형 오브제가 공간의 중심을 이룬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브랜드를 ‘둘러보는’ 경험이 가능하며, 쇼핑을 마친 후 매장 안에 위치한 로즈 베이커리에서 감각적인 사진 한 컷을 남기면 마레에서의 여행 한 페이지를 완성할 수 있다.
아르켓 파리(Arket Paris)
Arket Paris는 유럽 여러 도시에 있는 매장 중 비교적 작은 규모로 운영되며, 제품 수량도 제한적이지만 꼭 들러볼 만한 매장이다. 마레 중심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고, 셀렉된 아이템만을 선별해 진열한 덕분에 불필요한 동선 없이 브랜드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깔끔하고 실용적인 북유럽식 디자인을 좋아한다면 이곳의 의류, 홈웨어, 키친 아이템들은 흠잡을 데 없는 선택지다. 특히 매장 한쪽에 자리한 카페는 100% 식물성 메뉴와 계절 재료를 활용한 건강한 메뉴 구성이 돋보이며,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식사나 커피 한잔하기에 이상적이다. 여행 중 잠시 머물러 리듬을 조정하기에도, 마레 특유의 느긋한 공기를 느끼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BHV Marais
BHV Marais는 마레 지구의 중심, 시청 광장 바로 앞에 자리한 대형 백화점으로, 파리에서 가장 실용적인 쇼핑이 가능한 장소 중 하나다. 다른 마레의 편집숍이나 부티크와 달리 이곳은 명확하게 ‘백화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의류, 잡화, 리빙. 문구. 인테리어. 공구까지 거의 모든 카테고리를 망라한다. 특히 지하 1층의 철물, 공구 코너는 ‘파리 공구 천국’이라 불릴 만큼 세세하고 실용적인 상품들로 가득하며, 프랑스인의 일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또한 BHV Marais는 본관 외에도 골목 건너편 별관에 패션, 뷰티, 아동, 반려동물용품 등이 분야별로 나눠져 있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분산된 쇼핑이 가능하다.
By Heetae JUNG 정희태
와인과 사랑에 빠져 2009년 처음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 현재는 프랑스 국가 공인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하여 활동 중이다. <90일 밤의 미술관 : 루브르 박물관>, <파리의 미술관>, <그림을 닮은 와인 이야기>, <디스이즈파리> 총 네권의 책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