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처음 찾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수천 년의 역사와 셀 수 없이 많은 명작들이 기다리는 곳들이다. 하지만 한 예술가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을 꼽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파리 7구에 위치한 로댕 미술관, 이곳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실제로 작업하고, 산책하고,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공간이다. 그가 사랑했던 정원은 지금도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저택 안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든 조각들이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로댕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라기보다 한 예술가의 삶 속을 직접 걸어 들어가는 공간에 가깝다.
한 조각가의 유언이 만든 미술관

로댕 미술관은 원래 1727년 지어진 귀족 저택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귀족들의 사교 공간이었고, 혁명 이후에는 학교와 수도원, 관청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건물은 철거될 위기에 놓였지만 임대료가 저렴했던 덕분에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화가 앙리 마티스,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화가 장 콕토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저택을 거쳐 갔다. 릴케는 한동안 로댕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고, 그의 소개로 로댕 역시 이곳에 작업실을 얻게 된다.
로댕은 이곳을 처음 본 순간 깊이 매료되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 오래된 계단, 창밖으로 펼쳐지는 정원,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의 풍경까지. 그는 이곳이 자신의 조각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고 확신했다. 1916년, 로댕은 프랑스 정부에 자신의 모든 작품과 드로잉, 석고 원형, 개인 컬렉션 모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대신 단 하나의 조건을 남겼다. "이곳을 로댕 미술관으로 만들어 달라." 이듬해인 1917년 로댕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은 1919년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로댕의 청동 조각들은 모두 이 유산 덕분에 제작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로댕 미술관이 관리하며, 지금도 작품 보존과 연구에 사용되는 중요한 재원이 되고 있다.
저택 안에서 만나는 로댕의 예술 세계

일반적인 미술관과는 내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흰 벽에 작품만 전시된 현대적인 공간이 아니라, 로댕이 실제 생활했던 살롱과 응접실, 계단과 창문을 그대로 활용해 조각을 배치했다. 덕분에 작품은 전시품이라기보다 집 안에 자연스럽게 놓인 하나의 오브제처럼 느껴진다. 전시는 로댕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시대순으로 되어있다.
① 로댕의 시작, 코가 깨진 남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이나 ‘입맞춤’을 대표작으로 떠올리지만, 로댕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품은 오히려 ‘코가 깨진 남자’이다. 부러진 코, 깊게 패인 주름, 거칠게 다문 입술, 축 처진 피부. 당시 조각가들은 신화 속 영웅이나 젊고 아름다운 인체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흉터와 주름은 감춰야 할 결점이었다. 하지만 로댕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노동자가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남긴 흔적을 그대로 조각했다. 아름다움을 만들려 하지 않고 진실을 만들려 했다. 이 작품은 파리 살롱전에 출품되었지만 "지나치게 추하다"는 이유로 낙선한다. 그러나 훗날 미술사학자들은 바로 이 작품에서 근대 조각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로댕은 완벽한 육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감정을 조각하는 길을 선택했고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은 이 철학 위에서 만들어졌다.
② 살아 있는 듯한 조각, 청동시대
1877년 발표한 ‘청동시대’는 로댕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처음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사람 몸을 그대로 떠낸 것이 아니냐." 당시에는 실제 인체에 석고를 입혀 복제하는 방법이 금기시되었는데, 로댕의 조각은 그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개월 동안 모델을 관찰하고 수없이 스케치를 반복하며 직접 조각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시간이 흘러 의혹은 풀렸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해부학적 이해와 관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근육은 긴장하고 있고 손끝에는 미세한 힘이 들어가 있으며 금방이라도 숨을 들이쉴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고전 조각이 추구했던 완벽한 육체를 넘어 살아 있는 인간을 표현한 첫 번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③ 로댕의 평생을 바친 걸작, 지옥의 문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새로 건립될 장식미술관의 입구를 장식할 문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로댕에게 맡겼다. 그는 주제를 단테의 신곡, 지옥편으로 정했다. 하지만 로댕은 단순히 단테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옮기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지옥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사랑, 죄와 후회,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후 무려 37년 동안 이 작품을 붙들고 살았다. 수없이 인물을 만들고, 다시 떼어내고,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만 200여 점에 이른다. 그러나 로댕은 끝내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선언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로댕의 대표작 대부분이 모두 이 작품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문 위에서 턱을 괴고 있는 작은 인물은 훗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서로 입을 맞추는 연인은 ‘키스’로 독립했다. ‘세 망령’, ‘우골리노’, ‘달아나는 사랑’ 역시 모두 지옥의 문의 일부로 구상되었던 작품들이다.
④ 사랑을 조각한 작품, 키스

로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사랑받는 조각은 단연 ‘키스’이다. 주인공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 말라테스타다. 프란체스카는 정치적인 이유로 파올로의 형과 결혼하지만, 남편의 동생인 파올로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함께 아서 왕 이야기를 읽다가 입을 맞추게 되고, 그 순간 남편에게 발각되어 함께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지옥에 떨어진 두 영혼은 영원히 폭풍 속을 떠돌게 된다.
로댕은 바로 그 첫 입맞춤의 순간을 조각했다.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완전히 맞닿아 있지 않다. 입맞춤 직전의 가장 긴장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결국 지옥의 문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인물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이 연인들만은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로댕은 이 조각이 지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결국 독립 작품으로 완성했다.
⑤ 까미유 클로델, 제자이자 연인, 그리고 라이벌

로댕 미술관을 이야기하면서 까미유 클로델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녀는 흔히 로댕의 연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까미유는 스무 살 무렵 이미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던 조각가였다. 1883년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온 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를 넘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동반자가 되었다. 까미유는 로댕의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제작했고 손과 발 같은 세부 조각을 맡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의 작품은 로댕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로댕의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섬세한 움직임과 감정 표현은 까미유와 함께 작업하던 시기에 더욱 깊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로댕에게는 수십 년을 함께한 연인 로즈 뵈레가 있었고 그는 끝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다. 까미유는 독립적인 예술가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녀를 로댕의 제자 혹은 연인으로만 바라봤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했고 까미유는 그 상처를 자신의 대표작 ‘성숙’에 담아냈다.
성숙의 시대, 사랑이 떠나는 순간을 조각하다

까미유의 대표작 <성숙의 시대>는 로댕 미술관에서 꼭 시간을 들여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다. 조각에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나이 든 여인과 그녀에게 이끌려 떠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붙잡으려 두 팔을 뻗는 젊은 여인.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까미유 자신의 이야기로 해석한다. 떠나는 남자는 로댕, 젊은 여인은 까미유, 그리고 남자를 데려가는 나이 든 여인은 로즈 뵈레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물론 까미유가 직접 그렇게 설명한 적은 없지만,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두 사람의 관계를 고려하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무릎을 꿇은 젊은 여인의 손끝을 보면 절박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손가락 끝까지 뻗어 있지만 끝내 닿지 못한다. 반면 남자의 몸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이보다 더 절제되고 비극적으로 표현한 조각은 드물다.
안타깝게도 까미유의 삶은 더욱 비극으로 흘러간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 그녀는 점차 세상과 단절되었고, 1913년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 30년 동안 한 번도 작업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는 1943년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사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각가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로댕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단지 로댕의 미술관이 아니라, 두 예술가가 함께 사랑하고 경쟁하며 서로의 예술을 완성해 갔던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정원, 로댕이 완성한 가장 아름다운 전시장
비롱관에서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밖으로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로댕 미술관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잘 다듬어진 회양목과 장미 화단,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이어지는 산책길 곳곳에 로댕의 조각들이 놓여 있다. 일반적인 야외 조각공원처럼 작품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풍경 속에 녹아 있다.
실제로 로댕은 생전에도 자신의 작품은 하얀 전시실보다 자연 속에서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믿었다. 햇빛과 그림자, 바람과 계절의 변화가 조각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댕 미술관의 정원은 단순한 야외 전시장이 아니라 로댕이 직접 구상한 가장 이상적인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봄에는 장미와 아이리스가 정원을 물들이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 아래 청동 조각들이 한층 깊은 색감을 띤다.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단풍 사이로 조각들이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겨울에는 잎을 모두 떨군 나무 사이에서 작품의 실루엣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같은 작품이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의 탄생, 생각하는 사람

정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연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작품을 '철학자' 혹은 '깊이 사색하는 인간'의 상징으로 기억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880년 지옥의 문을 제작하던 로댕은 문 꼭대기에 한 인물을 앉혔다. 그는 단테의 신곡 속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를 표현하려 했다. 지옥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죄와 운명을 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작업이 계속되면서 이 작은 조각은 점차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로댕은 단테라는 특정 인물을 넘어 생각하고 창조하며 고뇌하는 인간 그 자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몸은 철학자보다는 노동자처럼 단단하다. 팔과 다리에는 굵은 근육이 드러나고 발가락 끝까지 긴장감이 전해진다. 그는 단순히 머리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몸으로 삶과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는 인물을 표현했던 것이다.
턱을 괸 자세도 흥미롭다. 얼핏 편안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 있다. 굽은 허리, 움켜쥔 발가락, 긴장된 팔과 어깨는 사색이 결코 편안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로댕은 "생각은 육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의 긴장감까지 함께 표현한 조각으로 평가받는다. 정원에 설치된 작품은 대형 청동 주조본이다. 하늘 아래 놓인 이 조각은 실내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맑은 날에는 강한 햇빛이 근육의 굴곡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흐린 날에는 무거운 청동색이 더욱 깊은 사색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이 작품을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② 영웅이 아닌 인간을 조각하다, 칼레의 시민들

정원을 조금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걸작 ‘칼레의 시민들’ 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1347년 영국군에게 포위된 프랑스 북부의 칼레는 오랜 항전 끝에 항복을 결정한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도시를 살려주는 대신 여섯 명의 시민 대표가 맨발에 밧줄을 목에 걸고 항복하러 나올 것을 요구했다. 죽음을 각오한 여섯 사람은 가족과 도시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선택했고, 다행히 왕비의 간청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기념비 제작을 의뢰받은 로댕은 예상과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기념비는 영웅을 높은 받침대 위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로댕은 여섯 사람을 관람객과 같은 높이에 세웠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는 주먹을 움켜쥐고 또 다른 이는 허공을 바라본다. 승리의 환희도 영웅적인 포즈도 없다. 대신 죽음을 앞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 책임감이 얼굴과 몸짓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로댕은 영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조각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100년이 넘은 지금도 현대적인 감동을 준다.
③ 하늘 아래에서 다시 만나다, 지옥의 문

정원에서는 지옥의 문의 청동 완성본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로댕이 생전에 이 작품의 최종 청동 주조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석고 원형을 바탕으로 미술관이 청동 주조를 진행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완성본이 탄생했다.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인물들의 그림자가 깊어지고, 계절마다 청동 표면의 색감도 달라진다.
천천히 걷는 것이 가장 좋은 관람법
로댕 미술관은 루브르처럼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미술관도, 오르세처럼 빼곡한 전시를 따라가야 하는 공간도 아니다. 오히려 천천히 걷는 것이 가장 좋은 관람법이다. 정원의 벤치에 잠시 앉아 조각을 바라보고, 장미 향기를 맡으며 산책하고, 나무 사이로 보이는 앵발리드의 황금빛 돔을 바라보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느리게 흐른다.
정원 한켠에 위치한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 디저트,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테라스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하루를 예술로 채우는 가장 완벽한 동선
로댕 미술관은 파리에서 하루를 가장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오전에는 앵발리드에서 나폴레옹의 무덤과 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어 로댕 미술관에서 조각과 정원을 천천히 산책한다. 이후 센강을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오르세 미술관에 닿는다. 로댕이 활동하던 시대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회화를 함께 감상하며 자연스럽게 19세기 프랑스 예술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파리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많지만 로댕 미술관만큼 예술과 자연, 건축이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지는 곳은 흔치 않다. 이 곳을 방문하게 되면 왜 로댕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저택과 정원을 떠나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이곳은 작업실이었고, 집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예술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풍경은 변함없이 파리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여행 정보
- 주소: 77 Rue de Varenne, 75007 Paris
- 운영시간: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45분, 월요일 휴관
- 입장료: 성인 약 15유로.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관람할 예정이라면 통합권을 이용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 가는 법: 지하철 13호선 Varenne역, 8호선 및 RER C Invalides역에서 도보 5분.
- 관람 시간: 저택과 정원을 함께 둘러본다면 2시간, 여유롭게 감상하려면 3시간 정도를 추천한다.
By Heetae JUNG 정희태
와인과 사랑에 빠져 2009년 처음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 현재는 프랑스 국가 공인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하여 활동 중이다. <90일 밤의 미술관 : 루브르 박물관>, <파리의 미술관>, <그림을 닮은 와인 이야기>, <디스이즈파리> 총 네권의 책을 출간했다.








